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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isesang, 2010/02/01 23:17, 잡문]

2월1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린 한 중국 여성의 눈물겨운 귀성 사진은 많은 사람의 눈을 붙잡았을 것이다. 지고 안고 들고 가는 여인의 모습은 고향으로 향하는 인간의 귀소본능이 얼마나 강한지 웅변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대단하지 않은가. 고향이 뭐길래 저렇게 지고 안고 들고 가는 것일까. 중국 난시성 광창 기차역에서 AP기자에게 잡힌 젊은 중국여성의 표정과 발걸음에는 '무엇이 가로막든 고향에 가겠다'라는 의지가 충만해 보인다. 더 가슴을 뭉클이게 하는 것은 여인의 남루한 옷차림과 대비되는 밝고 깨끗한 아이의 옷차림이다. 모성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사진이라해도 좋을 그런 사진이다.

25억명이 음력 설인 춘절을 맞아 대이동을 한다는 중국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장면이지만 우리도 얼마 전까지 이런 비슷한 모습으로 고향을 찾곤 했다.

아이폰 시대인 지금은 변해 볼 수 없는 광경이 돼버렸지만 흑백TV 조차도 동네에 한대 뿐인 시절 우리네 형과 누나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들은 바리바리 보따리를 들고 만원 버스,만원 기차에 몸을 싣고 고향으로 고향으로 향했던 적이 있었다.

동아일보 데이터 베이스에서 찾은 귀성 모습을 모아봤다.

                                           

                       사진=동아일보

1967년 9월16일 서울역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40여년전의 우리네 역사다. 끝도 없이 이어진 귀성인파 속에서 사람들은 고향에 가져 갈 선물 만큼은 부서지지 않도록 머리 위로 들고 있다.

고향에서 기다릴 부모 형제들에게 줄 귀한 선물 만큼은 자신의 몸이 부서지더래도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가 가방을 위로 향하게 했으리라.


                              사진=동아일보


6.25때 피난 열차가 아니다. 1968년 10월5일 촬영된 호남선 임시열차안의 모습이다. 통로에 발을 놓을 수 없는 탓에 짐칸에까지 올라 갔을테지만 저런 불편한 상태로 열 몇시간을 어떻게 갔을지 염려 섞인 궁금증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단정하게 머리를 깎은 남자들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조상님 차례 모시는 일에 있어서 세신(洗身)과 이발은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명절 아니라 부모님 제사 때도 바쁘면 안가는 세태가 일반화 된 오늘날, 추석이라고 짐짝 취급을 당하며 고향으로 향했던 저분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사진=동아일보

1970년 9월 광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가려는 얌체 귀성객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버스안에 빈좌석이 많은 걸로 봐서 창문으로 얼른 들어가 자리를 맡기위해 창피함을 무릅쓰는 것 같다. 스커트를 입은 여성도 좌석 쟁탈전에 참여했으니 고향 가는 길이 편하다면 동가홍상일 것이다.


                       사진=전민조

귀성을 나타내는 사진이기도 하지만 시대상이 짙게 투영되기도 한 걸작 도뮤멘터리 사진이다. 존경하는 전민조선배가 찍었다.

전선배의 설명에 이들의 마음이 그대로 들어나기에 그대로 옮긴다.

"어려운 서울살이. 잠시 고향가는 길도 난감하기만하다. 구정을 앞두고 새벽부터 고향가는 버스표 한장을 사려고 줄을 서봤으나 이리저리 떠밀리고 경찰까지 혹시 `새치기`가 아닌가 하고 끌어 내려하니 서글프기만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향한 의지는 列속으로 密着되어간다." 1978. 1.31./강남고속버스터어미널


                                 사진=동아일보

앞서 봤던 사진속의 혼란은 없다. 회사가 책임지고 귀성을 해주니 아귀다툼을 벌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버는 사람들이기에 고향으로 가져 갈 선물들이 그야말로 바리 바리 한짐씩이다. 1978년 9월16일 한국수출산업공단에서.


                                사진=동아일보

1987년 10월 경기도 벽제 부근 국도에서 촬영 된 사진이다.

"거북걸음 차량행렬
이번 추석 귀성길에는 고속도로 국도마다 차량홍수를 이루면서 중앙선 침범, 끼어 들기등 무질서한 운행으로 극심한 교통체증과 혼란을 빚었다. (碧蹄국도.1987년 10월7일) "

이라는 사진설명이 있는 걸로 미뤄볼 때 무질서를 탓하는 고발사진인것 같다.

지금 보니 무질서 보다는 10년 사이에 우리네 귀성길이 '확'달라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동아일보


"짐인지 사람인지...
귀성버스도 북새통. 연휴 마지막날인 3일 한꺼번에 몰린 귀성객들로 짐짝처럼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관광버스 짐싣는 곳에 승객이 앉아 있다.(1982년 10월3일)"

이 사진에 붙은 설명이다.

신문에 실릴 사진이기에 붙은 당연한 설명이지만 귀거래사를 읊었던 도연명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런 모습을 봤더라면 어떤 귀거래사를 부를까.

앞서 봤던 모습들은 이제 보기 힘들다. 잘 살고 편해졌기 때문이다. 하루를 꼬박 가야했던 고향은 이제 하루에도 몇 번씩 왕복할 만큼 가까이 있다.

고향이 멀리 있을 때 우리에게 고향은 '힘'이었다. 고향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힘이 불끈 솟았다. 그 힘으로 살았다. 고향이 가까운 지금 우리는 고향이 주는 힘을 받지 못한다. 변했기 때문이다. 고향이 없어진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잘못이었다. 고향은 항상 그대로 있었다. 굽어진 소나무 같은 고향이 중국 여인의 처절한 귀성 모습에서 다시금 빛을 발했다. 울컥했다.굽어있으니까 말이다. 고향은 그런 것이다.

아...고향이여...

[urisesang, 2009/11/11 23:32, 커튼 뒤의 사진들]

연탄. 세상에서 점차 사라지는 단어다. 연탄 없으면 하루도 못사는 사람들이 있어도 연탄은 이제 보기 힘들다. 외환위기로 석유 값이 급등해 연탄 생산량이 늘었다는 보도가 있긴 하지만 한국의 겨울철 난방의 주류는 연탄에서 석유로 간지가 한참됐다.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연탄이라는 단어는 점차 잊혀질 것이다. 30대 후반까지의 세대들에게 연탄은 무척이나 친숙한 단어다. 그네들에게 '연탄가스 중독'이란 경험도 적잖았을 것이다. 필자 역시 초등학교 3-4학년 시절 문틈으로 들어 온 연탄 가스에 중독 돼 자다 말고 동치미 국물을 먹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연탄이 타면서 나오는 일산화탄소를 동치미의 어떤 성분이 중화 시켰기에 그국물을 비상약 대신 먹었던 것같다. 70년대 신문 사회면에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람 몇이 죽었다라는 게 가끔씩 실렸다. 한국 가구의 거의 대부분이 연탄을 난방연료로 사용했기에 '가스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연탄 가스 중독 기사를 다뤘을 것이다.

며칠 전 동아일보에 연탄 사진이 실렸다. 불우이웃을 돕기위해 서울시 공무원들이 연탄을 나르는 사진인데 찬바람이 부는 이맘때 쯤이면 연탄은 꼭 신문에 등장한다. 연탄이 생활속에 녹아있는 스케치가 아니라 불우이웃을 돕기위한 이벤트성 행사로 나타나는 게 요즘 연탄 사진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 사진을 보고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봤다. 옛날 옛적의 연탄 사진을 찾아 옛날 얘기를 해볼까 했는데 아쉽게도 많지 않아 유감이었지만 그나마 몇 장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지금도 '삼천리' 연탄이 있는지 모르겠다. 사진설명이 없어 장소를 알 수 없지만 서울시내 어디쯤인 것 같다. 뒤따르는 할머니의 옷차림이 가벼워 여름인 것 같은데 연탄을 배달하는 게 재미있다. 여름에도 비오면 방이 축축하니까 습기를 없에기위해 연탄이 필요했을 것이다. 연탄장수가 나르는 20여장이면 한 달 보내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연탄의 품질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다. 까스는 저 구멍에서 나온다. 연탄은 지 몸을 한껏 태워 분홍빛 감도는 흰색인 재로 변하는 게 아쉬워 온기 말고 나쁜 것도 내보내는 것일까. 과학자가 아니라 잘 모르지만 무연탄의 성분을 조절하면 가스 뿜지 않은 연탄도 머잖아 나올 것 같다.



26년전에 찍은 사진이다. 어디 음식점 골목 같은데 화덕 하나에 달랑 세마리의 굴비가 있는 게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저때는 지금처럼 중국산도 범람하지 않았을 것이니 간판에서 보이는 것처럼 분명 진짜 영광굴비일 것 같다. 지금은 연탄대신 가스불로 생선을 굽는다. 동대문 원단시장 옆에 가면 생선구이를 해주는 집들이 모여있는 골목이 있는데 생선냄새만 맡아질 뿐 어렸을적 나를 핑핑돌게 했던 그 '까스' 냄새는 없다.



'화덕 배달업'이란 직업도 있었나 보다. 1977년에 찍은 사진 설명에 '이색 직업인 화덕배달업자가....'라고 돼있다. 업자의 두툼한 옷차림으로 미뤄보면 한겨울에만 잠시 있었던 직업이었을 것이니 신문에 소개됐을 터. 꽤 많은 화덕안에 있는 연탄들을 잘 관리해 배달하기란 만만치 않았을 텐데 예나 지금이나 남의 돈을 먹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은 퇴직한 모선배가 73년에 찍은 사진이다. 사진 설명은 이렇다 '4일 0시를 기해 석유값 30%인상이 있은 후 에너지 소비절약책의 일환으로 9일부터 일부도시의 연탄생산과 판매가 제한되었다. 市外반출이 제한되는 바람에 변두리 지역과 외곽도시에선 품귀소동에 값도 뛰고 김해등지에선 진정시위까지 있었는가 하면 부산의 범일동등 대도시 고지대 영세민들은 유난히도 차가운 날씨에 대야등을 이고 연탄가게에 하루종일 줄지어 서기도 했다.' 축약하면 연탄을 사기위해 줄지어 선 모습이다. 맨 앞에 할머니를 클로즈업 한 걸 보변 할머니가 들고있는 빨래판이 박선배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앞으로 한국이 몇 십년 퇴보를 하지 않는한 절대 보지 못할 장면이다.

흔한 것들이 세월이 가면 말하는 시대가 온다.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르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많은 것들을 심어 놓는다. 회상의 대부분은 긍정적이다. 아픈것들은 그리 오래 남지 않는다. 그것도 오래 담고 있으면 숙성시켜 언젠가는 세월의 옷을 입어 그럴듯 하게 변한다. 연탄 사진들도 비슷하다. 사진에 담겨있는 장면들 대부분이 치열하게 살았던 한시대의 기록들이지만 30여년이 흐르고 보니 감정이 더해져 아쉽게 흘러가버린 생활사로 여겨진다. 도큐멘터리 사진의 큰 응원군은 다름아닌 '시간'이다. 필자나 이글을 보는 네티즌들이나 어찌보면 우리들은 굉장한 것들에 둘러쌓여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의 골동품은 바로 이런 모습을 기록한 영상물일 것이다.


사진=동아일보

[urisesang, 2008/08/18 09:24, 사진공양/저자 거리의 부처님]

  제겐 단골 미용사가 있습니다. 머리를 잘 자르는 그가 동네 미용실에서 대학로의 미용실로 옮겼을 때 저도 미용실을 바꿨습니다. 그 미용실 앞에는 여느 횡단보도보다 두배 정도 큰 횡단보도가 있습니다. 대학로의 큰 횡단보도 이지요. 미용실에 갈 때 마다 이 횡단보도를 찍고 싶었습니다. 엊그제 카메라를 들고 갔습니다. 텅비어 있는 횡단보도는 휑했고 꽉 찬것은 갑갑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며 적당히 공간이 나왔을 때 셔터를 눌렀습니다. 4층의 미용실 창가에서 찍었으니 편히 찍은 셈입니다.

  대여섯살 개구장이 때 봉동의 큰 집에서 석양을 향해 아른아른 올라가던 연기를 잊지 못합니다. 큰어머니와 할머니는 차롓상 준비를 위해 가마솥 몇개를 마당에 내 놓은 후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장작이 타는 연기가 솥에서 나는 수증기와 함께 하늘로 올라갔었지요. 큰 집에는 대나무가 많았는데 대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과 거기에 앉아있던 참새들이 내는 소리 그리고 부지깽이에 불 붙혀 억지로 연기를 냈던 악동들의 소리가 올라가는 연기와 한데 어우러졌었지요.

  흘낏 봤던 정경은 제 마음속에 담겨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군에 있었던 80년대 중반 여주 강가에서 작전을 하며 연이어 이어진 산들을 보고 그 시절의 마당으로 다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노을사이로 보이는 남한강가의 연봉들을 보며 그 장면을 십 수년 만에 오버랩 시켰던 것입니다. 식판을 든 채 멍하니 서서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20대 청년의 가슴속에는 뭉클한 뭐가 올라 와 한참을 있었습니다.
사진은 저와 평생을 할 것 입니다. 큰 집 마당의 정경과 불교는 사진을 찍게 해주는 두기둥입니다. 촌놈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작은 감수성은 부지깽이를 든채 올라가는 연기를 봤던데서 왔고 무엇을 찍을 것인가는 불교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의 제목은 광장입니다. 눈에 보이는 촘촘한 줄과 눈에 보이지 않는 줄이 엉킨 곳입니다. 넓게 보이다가도 한없이 좁게 보이는 공간에서 우리는 부딛쳐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줄 지났다 싶으면 다시 한 줄이 나오고 옆으로 길게 늘어진 사선이 언제 끝날까 질릴 때 선은 끊어지고 새로운 선이 나옵니다. 이생이 다 인것처럼 살다가 새로운 것을 경험했을 때 다른 세상이 있음을 느끼는 것과 흡사 합니다. 광장은 공(空)의 한형태 입니다. 줄을 긋고 나누었던 것은 내가 한 일입니다. 대학로의 횡단보도는 언제고 있었던 삶의 공간을 현재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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