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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isesang, 2010/06/06 17:38, 잡문]

공양(供養).

불가에서는 부처님께 바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일의 공양은 법(法)공양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고 가장 나중의 것이 물질을 바치는 공양이다. 이 공양중의 하나가 소신공양(燒身供養)이다. 소신공양은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태워 부처님께 바치는 것이다. 경(經)에서 소신공양에 대한 유래를 찾자면 희견보살이 향유를 바르고 몸을 태워 공양함으로써 불은에 보답했다는 '법화경(法華經)'의 '악양보살본사품'이 있다. 자신을 태울만큼 간절한 원이 있을 때 올리는 공양인지라 흔히 보는 공양은 절대 아니다.

불가에서 이공양은 대개 정치적인 이유로 행해지는 듯 하다. 며칠 전 수좌(首座:주로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 문수스님은 4대강 공사에서 죽어나가는 생명들이 안타까워 그것을 멈추게 해달라는 원을 부처님께 올리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으니 역시 정치색을 띠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근세의 소신공양중 가장 유명한 그것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베트남 출신 틱 낙한 스님의 스승이신 틱 광둑(Thich Quang Duc)스님의 소신공양이다. 스님은 1963년 6월 고딘디엠 정권의 반불교정책에 항거하는 표시로 소신공양을 올렸다. 틱 광둑 스님은 당시 베트남의 고승이었다. 우리로 치자면 성철스님 만큼이나 불교도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신망이 두터운 종교 지도자이자 선승이 소신공양을 올린 것이다.
그런 스님이 만인환시리의 백주 대낮에 소신공양을 올렸으니 그 충격은 엄청났다. 스님이 모습을 찍은 말콤 브라운의 사진은 전세계로 퍼져 반전에 대한 여론이 들끓었고 미국은 고딘디엠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틱 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모습=사진 출처 다음 이미지



불길이 스님의 온 몸을 휘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자세는 꼿꼿하기 이를데 없다. 스님의 수행이 어느정도인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삼매에 들었기에 불길의 뜨거움과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지만 불가사의하다.

스님은 소신공양을 하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불에 다 타고서 쓰러질 때 앞으로 쓰러지면 이 나라에서 불교가 사라질 것이니 너희들은 빨리 베트남에서 탈출하여 딴 나라로 가서 불법이 망하지 않도록 하고 내가 뒤로 쓰러지면 이 나라에서 불교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뒤로 쓰러져서 베트남에서 불교가 다시 회복됐다고 한다.

불길 속에서도 꼿꼿한 스님의 모습은 사람을 해치기도 했던 만주 벌판의 사나운 들개들이 수월스님을 만나면 꼬리를 치며 반가워했던 모습이나, 임진왜란 후 평화협정을 위해 일본에 갔던 사명당 유정대사를 왜가 해칠려고 스님이 주무시던 방을 막고 불을 땠으나 스님은 오히려 가부좌 한 채 염불 삼매에 든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소신공양도 법을 펴기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한다.

불길 속에서도 고요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스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육신이 한낮 4대(地,水,火,風)로 뭉쳐진 것이며 그것은 언제든 변하는 것이라는 말씀에 고개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이생에 뒤집어쓰고 있는 몸이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거기에 매달리지 않음을 수행의 결과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법에 엎드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틱 광둑 스님의 소신공양이나 문수스님의 그것을 보며 안타까움은 남는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urisesang, 2010/02/22 22:28, 잡문]
최근 남자 프로 골프 세계랭킹1위인 타이거 우즈가 자신의 무분별한 엽색행각을 깊이 사과하며 "다시 불교에 귀의 하겠다"란 말을 했다. 그간 우즈는 불자로 알려졌으나 "불교를 떠나 있었다"고 한다. 타이거 우즈가 어떻게 불자가 됐는지는 잘모르지만 태국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태국은 불교를 국교로 받들고 있는 불교의 나라다.

"다시 불교에 귀의한다"라는 말은 자신이 극도의 어려움속에 처해있던 상황에서 나왔기에 부처님의 힘을 빌어 어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평안을 이루고 싶다는 기원으로 받아들여진다. "다시"란 말 속에 우즈가 어느정도 불교를 알고 있는지 나타난다.

불교의 중심 개념 중에 "인연"이 있다. 원인의 결과가 바로 인연이다. 내가 보는 것 만나는 것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해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어떤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그 원인이 인이며 나타난 결과가 연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은 폭이 넓다. 전생과 윤회가 있으며 아까 바로 한 생각도 인연을 맺게한 원인으로 본다.

우즈가 불교에 귀의한 후 불교의 가르침을 부정하거나 혹은 계율을 어긴 다음 그 자책에 '나는 더이상 불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손 치더라도 '불교에 귀의한 것'이 무효가 되지 않는다. 귀의한 인연은 인연대로 남고 그 행동에 대한 책임만 남는 것이다. 즉 과보를 받아야할이 남았을 뿐이다. 불교에서는 그 어떤 것도 공짜가 없음을 강조한다. 만약 좋은 생각을 했다면 언젠가 그것에 맞는 결과를 맞을 것이고(선업의 과보) 어떤 나쁜 생각을 가졌더라면 역시 언젠가 그 댓가(악업의 과보)를 받는다.
따라서 우즈에게 남은 것은 "다시 귀의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참회"인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속죄를 해야하는 것이다. 만약 참회가 진정성을 띤다면 우즈가 받을 과보는 훨씬 옅어질 것이나 받지 않은 일은 결코 없다.

나는 그래서 "다시 불교에 귀의하겠다"란 말을 "진정한 참회를 하겠다"란 말로 받아들인다.
어떤 스님으로부터 미국에 불명(佛名)을 가진 사람이 3백만명에 달한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숫자가 미국민의 1%에 달할정도로 많은 것에 놀랐다. 자본주의의 종말의 모습을 갖고 있는 미국에 그렇게 많은 불자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명을 받았다는 것은 계율을 받고 불교적인 가치관을 실행하기위해 노력한다는 말과 같다. 우즈가 그 1%안에 들어가 천지개벽한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를일이다.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골프 스타가 부침을 겪으면서 불교를 언급했다는 게 어찌보면 우즈와 불교의 두터운 인연을 말해주는 것일수도 있다.  그 덕에 많은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것이고 어떤 사람은 실제 '불교에 귀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즈는 자신의 불륜을 사과하는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세상에 많은 인연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우즈가 "다시 불교에 귀의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하나 불자로서 그리고 그의 골프를 경외하는 팬 입장으로서 부디 그가 맑은 얼굴로 나타나 호쾌한 장타를 날렸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urisesang, 2010/02/01 23:17, 잡문]

2월1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린 한 중국 여성의 눈물겨운 귀성 사진은 많은 사람의 눈을 붙잡았을 것이다. 지고 안고 들고 가는 여인의 모습은 고향으로 향하는 인간의 귀소본능이 얼마나 강한지 웅변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대단하지 않은가. 고향이 뭐길래 저렇게 지고 안고 들고 가는 것일까. 중국 난시성 광창 기차역에서 AP기자에게 잡힌 젊은 중국여성의 표정과 발걸음에는 '무엇이 가로막든 고향에 가겠다'라는 의지가 충만해 보인다. 더 가슴을 뭉클이게 하는 것은 여인의 남루한 옷차림과 대비되는 밝고 깨끗한 아이의 옷차림이다. 모성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사진이라해도 좋을 그런 사진이다.

25억명이 음력 설인 춘절을 맞아 대이동을 한다는 중국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장면이지만 우리도 얼마 전까지 이런 비슷한 모습으로 고향을 찾곤 했다.

아이폰 시대인 지금은 변해 볼 수 없는 광경이 돼버렸지만 흑백TV 조차도 동네에 한대 뿐인 시절 우리네 형과 누나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들은 바리바리 보따리를 들고 만원 버스,만원 기차에 몸을 싣고 고향으로 고향으로 향했던 적이 있었다.

동아일보 데이터 베이스에서 찾은 귀성 모습을 모아봤다.

                                           

                       사진=동아일보

1967년 9월16일 서울역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40여년전의 우리네 역사다. 끝도 없이 이어진 귀성인파 속에서 사람들은 고향에 가져 갈 선물 만큼은 부서지지 않도록 머리 위로 들고 있다.

고향에서 기다릴 부모 형제들에게 줄 귀한 선물 만큼은 자신의 몸이 부서지더래도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가 가방을 위로 향하게 했으리라.


                              사진=동아일보


6.25때 피난 열차가 아니다. 1968년 10월5일 촬영된 호남선 임시열차안의 모습이다. 통로에 발을 놓을 수 없는 탓에 짐칸에까지 올라 갔을테지만 저런 불편한 상태로 열 몇시간을 어떻게 갔을지 염려 섞인 궁금증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단정하게 머리를 깎은 남자들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조상님 차례 모시는 일에 있어서 세신(洗身)과 이발은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명절 아니라 부모님 제사 때도 바쁘면 안가는 세태가 일반화 된 오늘날, 추석이라고 짐짝 취급을 당하며 고향으로 향했던 저분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사진=동아일보

1970년 9월 광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가려는 얌체 귀성객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버스안에 빈좌석이 많은 걸로 봐서 창문으로 얼른 들어가 자리를 맡기위해 창피함을 무릅쓰는 것 같다. 스커트를 입은 여성도 좌석 쟁탈전에 참여했으니 고향 가는 길이 편하다면 동가홍상일 것이다.


                       사진=전민조

귀성을 나타내는 사진이기도 하지만 시대상이 짙게 투영되기도 한 걸작 도뮤멘터리 사진이다. 존경하는 전민조선배가 찍었다.

전선배의 설명에 이들의 마음이 그대로 들어나기에 그대로 옮긴다.

"어려운 서울살이. 잠시 고향가는 길도 난감하기만하다. 구정을 앞두고 새벽부터 고향가는 버스표 한장을 사려고 줄을 서봤으나 이리저리 떠밀리고 경찰까지 혹시 `새치기`가 아닌가 하고 끌어 내려하니 서글프기만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향한 의지는 列속으로 密着되어간다." 1978. 1.31./강남고속버스터어미널


                                 사진=동아일보

앞서 봤던 사진속의 혼란은 없다. 회사가 책임지고 귀성을 해주니 아귀다툼을 벌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버는 사람들이기에 고향으로 가져 갈 선물들이 그야말로 바리 바리 한짐씩이다. 1978년 9월16일 한국수출산업공단에서.


                                사진=동아일보

1987년 10월 경기도 벽제 부근 국도에서 촬영 된 사진이다.

"거북걸음 차량행렬
이번 추석 귀성길에는 고속도로 국도마다 차량홍수를 이루면서 중앙선 침범, 끼어 들기등 무질서한 운행으로 극심한 교통체증과 혼란을 빚었다. (碧蹄국도.1987년 10월7일) "

이라는 사진설명이 있는 걸로 미뤄볼 때 무질서를 탓하는 고발사진인것 같다.

지금 보니 무질서 보다는 10년 사이에 우리네 귀성길이 '확'달라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동아일보


"짐인지 사람인지...
귀성버스도 북새통. 연휴 마지막날인 3일 한꺼번에 몰린 귀성객들로 짐짝처럼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관광버스 짐싣는 곳에 승객이 앉아 있다.(1982년 10월3일)"

이 사진에 붙은 설명이다.

신문에 실릴 사진이기에 붙은 당연한 설명이지만 귀거래사를 읊었던 도연명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런 모습을 봤더라면 어떤 귀거래사를 부를까.

앞서 봤던 모습들은 이제 보기 힘들다. 잘 살고 편해졌기 때문이다. 하루를 꼬박 가야했던 고향은 이제 하루에도 몇 번씩 왕복할 만큼 가까이 있다.

고향이 멀리 있을 때 우리에게 고향은 '힘'이었다. 고향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힘이 불끈 솟았다. 그 힘으로 살았다. 고향이 가까운 지금 우리는 고향이 주는 힘을 받지 못한다. 변했기 때문이다. 고향이 없어진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잘못이었다. 고향은 항상 그대로 있었다. 굽어진 소나무 같은 고향이 중국 여인의 처절한 귀성 모습에서 다시금 빛을 발했다. 울컥했다.굽어있으니까 말이다. 고향은 그런 것이다.

아...고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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